학생들의 부담(주로 암기부담)을 덜어주고 교재의 활용도(교재는 정해놓고 왜 안쓰느냐는 학생들의 항변에 대응해서)를 높이기 위해 이번 학기부터 오픈북 테스트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미 교재의 분량을 A5 지(A4 지 절반 크기) 200페이지(속표지, 서문, 차례, 본문, 부록, 참고문헌, 색인 포함)로 한정하고 이 내용에 따라 강의를 진행함으로써 학생부담과 교재활용도 측면에서 최적화를 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내용의 예전 강의에 비해 중간고사 평균점수가 20점가량 떨어졌다. 문제가 더 쉬웠는데도. 왜 그럴까?

오픈북 치매가 그 원인이 아닐까 싶다. 오픈북이기 때문에 아예 공부를 덜 하고 시험장에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네비게이션의 사용으로 운전자들의 길눈이 더 어두워지고 스마트폰의 사용으로 사용자들이 더이상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않게 되는 디지털 치매와 마찬가지랄까?

학생들이 잘못 생각하는 지점이 여기다. 왜 오픈북이면 공부를 덜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오픈북이기 때문에 더 어려운 문제가 나올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 것일까? 아니, 아무리 쉽게 나오더라도 최소한 50페이지 셋째줄을 적어보라는 식의 어이 없는 문제가 나올 리 없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것인가?

오픈북은 "암기"에 대한 부담을 덜어줄 뿐, "이해"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는 게 아니다. 내용에 대한 이해도 없이 책만 들고 들어오면 아무리 쉬운 문제라도 맞추기 어렵다. 그리고 그 "암기"에 대한 부담을 덜어준다는 것도 아무것도 암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이해를 하려면 최소한의 암기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어떤 개념을 이해하려면 기초적인 용어는 알고 있어야 하니까. 오픈북은 고도로 복잡한 수식이나 그래프처럼 기억하기 어려운 것들에 대한 암기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지 기본적인 정의와 개념에 대한 암기마저 하지 않아도 되는 시험방식은 결코 아니다. 오픈북이어도 시험시간은 여전히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평소에도 하지 않는 공부를 시험장에 들어와서 50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처음부터 다시 해서 시험을 볼 셈인가?

스마트폰이나 네비게이션에 너무 의지해서 사는 사람들은 이들을 잃어버리거나 이들이 고장나면 큰 낭패를 겪게 된다. 난 누구고 여긴 어딘가 싶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기기에 극단적으로 의존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이들 기기는 보조장치에 머무르는 게 바람직하다. 원래 그런 목적으로 개발되었고. 오픈북 테스트도 마찬가지다. 교재에 의존하지 않고도 시험을 치를 수 있도록 시험준비를 해야 실제 시험상황에서 긴장하고 당황해서 아는 것마저 떠오르지 않을 때 교재의 도움으로 무사히 시험을 치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기말에는 오픈북 치매현상이 줄어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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