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故 신해철은 MBC 무릎팍도사에 출연해서 안면인식장애를 토로한 적이 있다. 방송국에서 손석희 아나운서를 마주치고는 가수 성시경인 줄 알고 얘가 왜 나한테 인사를 안하는지 의아해한 적이 있단다. 사실,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사람의 얼굴을 잘 못알아보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 그런데, 나도 그럴줄이야...

어제 강의를 하러 조금 일찍 강의실로 갔는데, 앞 강의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여서 강의실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는 학생들이랑 얘기를 나눴다. 인간관계가 파편화되어서 요즘 학생들은 대개 혼자 강의를 듣는다. 기껏해야 친구 두명이 함께 강의를 듣는 게 전부다. 한 학기 내내 같은 강의를 들어도 다른 학생들과 교류도 없어서 서로 같은 강의실에 있었다는 사실도 잘 모른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세명의 여학생이 잡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신기해서 그 친구들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어보니 전에도 내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믿고 듣는 교수님이란다. 그런데 나는 전혀 이 친구들을 모르겠다. 사회과학과 수학을 들었다는데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언제 들었냐니까 재작년 가을에 들었단다. 연구년 가기 직전 마지막 학기다. 그래??? 그런데 심지어 그중 한 학생은 입학할 때 내가 면접관이었단다. 뭐라고??? 그리고 이 얘기를 사회과학과 수학 시간에도 한 적이 있단다! 뭣이라??? 뿐만 아니라, 입학후부터 줄곧 내 지도학생이란다!!! What??? 그런데도 내가 전혀 기억을 못한다고??? 심지어 어제 내가 주관하고 심사를 맡았던 영어 프리젠테이션 대회 우승자란다! 그러고 보니 어제 본 그 학생이 맞는 것 같았다.

이 학생도 섭섭했겠지만 나로서도 충격이었다. 원래 학생들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고 학생들한테도 그 점에 대해서 양해를 구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대체로 얼굴은 잘 기억하는 편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친구들은 뭐란 말인가? 설마 안면인식장애...는 아니겠지? 학생들에 대한 미안함에 이 친구들의 이름을 물어보았다. 최소한 이 친구들은 이름과 얼굴을 잊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해보았다. 다음 학기에 이 친구들이 또 내 강의를 듣게 되면 반드시 알아보겠노라고.

PS  - 글을 맺으려다가 혹시나 다음학기에 이름을 까먹을까봐 이름을 적어본다. 이소민(지도학생), 윤예은, 제희정. 휴... 자괴감...

PS - 그러고 보니 2015년 강의평가에도 이런 평가가 있었다는 게 기억이 났다. 링크의 12번 평가가 그렇네... 휴... 옛날부터 그랬던 것인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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