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르치는 모든 과목에는 과제가 2회씩 있다. 2회 모두 1,500자 이상으로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을 적어내면 5점 만점을 주는 걸로 하고 있다. 분량미달이면 0점이고 표절이 발견되면 그냥 과목 자체가 F다. 1,500자 그래봐야 A4 1페이지지만, 이것도 부담스러워서 주리를 트는 학생들이 많다. 물론 TMT(Too-Much-Talker)라서 1,500자는 넉근히 넘기고 3,000자를 넘어가는 학생들도 있긴 하다. 이런 학생들 중에, 현재를 중시하는 본인과 미래를 중시하는 남자친구 사이의 갈등을 어떻게 풀어야할지 조언을 구하는 글이 있었다. 나는 이 글을 보자마자 이솝우화 "개미와 베짱이"가 생각났다.
"개미와 베짱이"에서 개미는 여름철 내내 열심히 일한다. 반면, 베짱이는 바이올린을 켜면서 정말 신나게 논다. 그 결과, 겨울이 되면 개미는 여름철 내내 모아둔 양식과 땔감으로 등따시고 배부르게 살아가는 반면, 베짱이는 모아둔 것이 없어서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다가 결국 개미에게 손을 벌리게 된다. 물론 개미의 거절로 베짱이는 죽는다. 참고로, 동화버전에서는 이게 너무 잔혹하다고 봤는지, 개미가 기꺼이 베짱이를 도와주고 베짱이는 바이올린 연주로 보답을 하며 참회하는 것으로 끝이 나기도 한다. 이 내용만 보면 개미가 옳고 베짱이는 그르다.
하지만, 현대에는 이 우화에 대한 여러 버전의 패러디가 있다. 그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개미는 사실 여왕개미의 노예로서, 열심히 일해서 모아둔 모든 것은 여왕개미의 소유다. 개미는 그냥 뼈빠지게 착취당하는 노예로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최소한의 먹이에 의지해 겨울을 연명해나갈 뿐이다. 반면, 베짱이는 비록 겨울에 추위와 굶주림으로 비참하게 죽긴 했지만 한번 사는 인생 불꽃처럼 화끈하게 즐기다 간 셈이기 때문에 짧고 굵게 잘 살고 갔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이런 패러디도 있다. 개미는 여름 내내 열심히 일한 댓가로 겨울에 과로사한다. 반면에 베짱이는 여름 내내 연주한 바이올린 실력으로 음반을 냈는데, 이게 대박이 나면서 큰 돈을 벌게 된다. 그리고 그 돈으로 한겨울 추위를 피해 따뜻한 남쪽 나라로 해외여행을 떠난다.
우리나라 대학생들이 진로선택과 취업문제로 고민이 많다보니 요즘은 대2병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미래의 취업을 위해 현재를 스펙 쌓기로 힘들고 바쁘게 보내고 있는 학생도 많고, 아직 진로를 정하지 못해 스펙쌓기는 시작도 못하고 걱정과 고민으로 우울한 나날을 보내는 학생도 많다. 물론, Carpe Diem을 외치면서 미래보다는 현재를 즐기는 학생도 많다(청년백수 100만 시대에 이런 학생이 어딨냐 하겠지만 진짜다. 과제 받아보면 의외로 많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극단적으로 현재만 생각하는 학생들도 많다. 이런 학생들은 오히려 걱정 없이 행복한 편이다.). 하지만 인생에 정답은 없다. 원래의 "개미와 베짱이" 우화처럼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지만, 현대의 패러디처럼 현재를 즐기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이다 뭐다 해서 워낙에 세상이 급변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한 가지 직업(직장이 아니라 직업이다)으로 평생을 살아갈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 인생 2모작, 3모작 시대인 것이다. 어쩌면 앞으로 대학도 평생 1군데가 아니라 2~3군데 다녀야할지도 모른다. 기존 산업이 사라지고 전혀 새로운 산업이 생겨나면 거기서 일할 지식이 필요할테니까. 그렇다면, 과연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일까? 현재를 희생해서 준비한 그 미래라는 것이 급격한 사회변화로 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학생들이 너무 미래에 대해 해골 뽀개지는(ㅎㅎㅎ) 걱정을 할 필요는 없어보인다. 희박한 확률이겠지만, 음반 내서 인생역전을 맛보는 베짱이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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