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발걸음

 

조승모

 

아버지와 함께 산책이나 등산을 하다보면 수십년전에 아버지께서 가르치셨던 제자들이 아직도 연락을오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전화를 끊고 나면 아버지께서는 한동안 신이 나셔서 이제는 같이 늙어가고 있을 그 제자의 어릴 적 모습을 회고하시며 어린 아이처럼 즐거워하신다.

 

"그게 언제적 이야긴데, 아직도 내가 가르쳤던 시대별 문학작품 표를 외우고 있단다. 그 표덕분에 입학시험을 잘 봐서 인생이 바뀌었다고 아직까지도 연락을 하네. 이 친구 덕분에 방송국 구경도 다 하고... 허허허."

 

사실, 그런 연락이 얼마나 반가운지는 겪어 보지 않고는 모른다. 옆에서 보고 있노라면 단지 신기하고 부러울 뿐이다. 마치 조선시대나 고려시대의 평생에 걸친 사제지간을 보는 것 같아서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한편으로는 그런 관계가 이제는 "정도전" 같은 사극에서나 볼 법한 관계가 된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은사님 찾아뵐 생각도 못 할 정도로 여유가 없는 것 같다. 실제로 먹고 살기 바빠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언젠가부터 스승을 스승이라 여기지 않고 "가르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 즈음으로 여기게 된 세태도 한 몫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일부러 연락을 하고 발품을 팔아 직접 찾아오는 제자들이 여럿 있으신 아버지가 항상 존경스럽고 부러웠다. 도대체 어떻게 하셨길래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연락을 하고 직접 찾아오기까지 하는 걸까?

 

오늘, 내가 경북대에서 가르치던 시절 1년간 내 전공과목을 모두 수강한 여학생(이제는 학생이 아니지만 마땅한 호칭이 없다.)이 연구실로 찾아왔다. 5월 황금연휴를 맞아서 고향에 내려온 차에 인사드리러 왔다는 것이다. 그것도 모교도 아닌 영남대로 말이다. 단지 내가 여기 있다는 이유로. 그 반가움이란 이루 말로 표현할 길이 없었다. 이래서 아버지께서 그렇게도 즐거워하셨구나 싶었다.

 

솔직히, 나는 그 친구한테 특별히 해준 게 없다. 단지, 학생들이 사촌동생들(대입 재수생부터 나보다 한살 적은 아이까지 사촌동생들의 스펙트럼이 좀 넓다.) 같아서 웃으면서 대한 것 뿐이고, 대견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서 애달파 했을 뿐이다. 그래서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고 했던 것인데, 그런 걸 알아주고 그런 게 고마워서 어려운 발걸음을 한 모양이다. 지금같은 세태에 그런 걸 알아준다는 게 보통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더 반갑고 그래서 더 힘이 나는 것이 아닐까?

 

이제는 스승을 찾아뵙는 일이 어려운 발걸음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그 친구가 더욱 고맙다. 훌륭한 스승은 훌륭한 제자가 만드는 법이다. 정작 나 스스로는 훌륭한 제자가 되지 못했음에도, 나를 훌륭한 스승으로 만들어준 그 친구가 참으로 반가웠다. 못난 제자여도 훌륭한 스승이고 싶긴 한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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