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수강정정기간이 끝났다. 내 학부강의의 최종수강인원은 주간 188명, 야간 63명이다. 상당히 대규모 강의가 돼버렸다. 한때 폐강(2013년 1학기)되기도 했었던 강의인데 이렇게 된 건 왜일까?

1. 일단 분량이 적다. 교재 총 페이지 수가 200페이지 밖에 안된다. 그것도 속표지, 서문, 차례, 참고문헌, 찾아보기 다 합쳐서. 그렇다. 학생들은 많이 배우고 싶어하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폐강될 때보다 더 적게 가르치는 건 확실하다.

2. 미적분과 통계학이 등장하지 않는다. 문과생 치고 수학을 좋아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아니, 한국사람 치고 수학을 좋아하는 사람이 드물다고 해야할까? 다들 인생의 어느 시점에 수학을 손에서 놓는다. 그래서 수학을 많이 쓰는 과목은 항상 폐강의 위험이 있는 것 같다. 반대로 수학이 많이 등장하지 않으면 꿀강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폐강당시에는 수업중에 당연히 미적분을 했었다.

3. 수업참여가 없는 일방적인 주입식 강의이다. 강의를 개선해보고자 많은 수업참여방식을 시도해봤지만, 결국 구식강의방식으로 돌아왔다. 학생들은 질문을 하기도 싫어하고 수업시간에 뭔가 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수업참여를 유도하고 이를 점수화하면 스트레스를 받고 싫어한다. 수강생수가 줄어든다. 그래서 내 강의에서 이제 수업참여는 없다.

4. 과제가 형식적이다. 학교에서는 공부를 많이 시키려고 의무적으로 학기당 2회의 과제를 부과하도록 하고 있지만, 과제를 하고 싶어하는 학생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내 경험상 과제가 많고 난이도가 높을수록 수강생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다. 사실, 과제가 많으면 채점자 입장에서도 힘들다. 그래서 2회의 과제를 매우 형식적인 걸로 낸다. 교수한테 하고 싶은 말 1,500자 이상 써서 제출하기. 중간고사 전 1회, 기말고사 전 1회. 물론, 학교의 방침만 아니면 아예 없애고 싶다.

5. 오픈북 시험을 치른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오픈북으로 치른다. 난이도는 클로즈드북 시험과 같다. 학생들은 이게 심적으로 큰 위안의 되는 것 같다. 최소한 암기부담은 덜어주는 시험이니까. 재밌게도 같은 난이도의 시험을 오픈북으로 보면 학생들 점수는 더 낮다! 시험준비 부담이 적다고 처음부터 공부를 덜 하는 거다. 그래도 좋단다.

6. 같은 내용을 여러번 반복한다. 분량이 적다보니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가르칠 수 있다. 그래서 웬만큼 농땡이를 부리지 않는 이상 수업내용을 수업중에 다 소화할 수 있다. 물론, 수업 끝나고 까먹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이 부분도 학생들이 좋아하는 부분인 것 같다. 아마존의 서평들을 보면 대체로 본인이 이해 못하면 악평을 단다. 아마존까지 갈 것도 없이 강의평가만 봐도 그렇다.

7. 웃기는 헛소리를 많이 한다. 수업중 시간적 여유가 많다보니 진도에 쫓기지 않고 수업내용과 관련되는 헛소리를 많이 하게 된다. 수업내용과 관련되는 사례, 비하인드 스토리, 산업동향, 취업, 연애, 우정, 모험... ㅎㅎㅎ; 사실 학생들은 수업내용보다 이런 헛소리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무슨 이야기든 수업보다야 더 재밌는 법이다. 시험기간에 갑자기 방청소가 하고 싶어지는 심리와 비슷하달까?

8. 학점을 잘 준다. 학칙상 A이상 35%, B이상 70%를 초과해서 학점을 부여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래서 내 강의에서는 A+ 35%, B+ 35%를 부여하고 있다. 비율 꽉 채워서 +를 달아준다. 일명 학점느님.

9. 0점 방지문제가 있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에서 0점을 맞아서 F를 맞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0점 방지문제를 낸다. 학생들 입장에서는 최소한 시험성적에 의한 F는 면할 수 있도록 안전장치가 생긴 셈이다.

1~7은 수업을 들을 때의 인풋이 비교적 적다는 얘기고, 8과 9는 아웃풋이 굉장히 좋다는 얘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내 강의는 학생들 입장에서 가성비가 매우 좋은 강의라 하겠다. 이것이 바로 꿀강의 본질이 아닐까 한다. 내 강의는 꿀강이 맞는 것 같다.

'가르치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대차이  (0) 2019.03.26
인큐믹스 신입기수 지원서 감상문  (0) 2019.03.19
밥약의 경제학  (0) 2019.03.08
대학에서 배운 전공지식을 쓰려면...  (4) 2019.02.25
바람 찬 흥남부두에~  (2) 2019.02.05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