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전 내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아직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 가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휴일을 맞아 집사람과 함께 서울 경복궁과 삼청동 일대로 놀러갔다가 차 세워둔 곳에서 너무 멀어지는 바람에 택시를 타게 되었다.
목적지를 말하고 보니 택시 기사님이 상당히 고령이셨다. 80세는 되어 보였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말투가 어딘가 세련된 느낌이었다. 기사님은 집사람과 내가 쓰는 경상도 사투리를 들으시고는 서울시민으로서의 사명감 같은 게 솟아오르셨는지 어디 가면 볼 게 많은지 열변을 토하시는 게 아닌가?
그래서 웃으면서 저도 서울에서 학교 오래 다녀서 잘 압니다 하고 말씀드렸더니, 어느 학교 나왔느냐고 물으셨다. 고대 나왔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당신은 연대 나왔다고 말씀하시면서 영광스러운 과거에 대해 줄줄 털어놓기 시작하셨다. 와, 대학생은 커녕 고등학교 졸업자도 귀하던 1950년대에 연세대 출신이라니, 그 세대에서는 초엘리트 출신이시구나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야기를 듣다보니 연세대 경영학과를 나와서 어느 대기업에 입사해서 그곳에서 사장까지 지내고 1980년대 중후반에 퇴직하신 분이 아닌가?
택시에서 내려서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서 검색을 해보았다.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기업이었지만 최소한 1980년대까지 존속했었던 대기업이 맞았다. 그리고 그곳 역대 사장 명단에서 그 기사님의 성함을 찾을 수도 있었다. 정말 그 노기사님은 연세대 경영학과 출신의 대기업 사장 출신이었던 것이다!
택시 기사라는 직업을 비하할 의도는 없지만, 어째서 대기업 사장 출신의 노신사가 퇴직하고 수십년이 지난 시점에 택시 운전을 하고 있었던 걸까?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국민연금이 도입된 것이 1980년대 후반이라는 점이다. 즉, 그 택시 기사님은 연금의 혜택을 누릴 수 없는 세대였던 것이다. 게다가, 1990년대 중반까지 고도성장기 고물가 시대와 1997년 IMF 외환위기 등 퇴직 후의 변화무쌍했던 사회경제상황을 순탄하게 보내지 못하셨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볼 뿐이다.
현재 베이비부머 세대의 은퇴와 그들의 곤궁한 노후 문제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인구구조 변화와 연금개혁 등의 문제와 얽혀 정년연장에 관한 논의도 조금씩 화두가 되고 있다. 하지만, 청년실업 문제를 비롯한 세대간의 이해관계와 복잡한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지금의 청년들도 노후에 똑같이 겪게 될 문제가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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